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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걸음이 누군가에겐 절실한 길이 됩니다

나는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전반부 인생이 내가 해보고 싶은 걸 도전해 본 인생이었다면, 남은 인생은 사회에 진 빚을 갚고 싶었다.

사람은 출구를 알 수 없는 인생의 동굴을 걸어간다. 누군가는 밝은 랜턴을 들고, 누군가는 꺼질 듯한 작은 촛불에 의지한 채.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촛불로 암흑 속을 걸어 본 사람만이 그 심정을 제대로 안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걷다 넘어진 아픔과 다시 일어나 걸어간 경험이 있어 동행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다 문득, 글쓰기의 본질에 의문을 던지는 G.H. 하디의 글을 보게 됐다.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설명이나 비평, 감상은 이류급 정신의 일이다.”(주석1) 천재 수학자로 평가받는(주석2) 그의 말은 너무나 솔직했다. 자신의 생각을 미화하지 않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런 정직한 견해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화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나는 그의 견해를 평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말만 듣고 낙담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뿐이다.

천재도 혼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수 없다. 누군가는 무명으로, 누군가는 평범하게 쌓아 올린 토대가 있었기에 그 위에서 새로운 창조가 탄생한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걸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쓴다면 그건 일류가 아니다. 능력은 부족해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헌신, 무모해 보일지라도 한 걸음 내딛는 용기가 있다면 나는 그런 삶을 일류라 부르고 싶다. 

글쓰기 혹은 문학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자주 느낀다. 마치 창조하는 글만이 진짜 글쓰기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생각들에 눌려, 시작조차 못 해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그런 시선 앞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문학적인 표현, 창조적인 문장, 기발한 비유나 우아한 수사가 담긴 글보다는 투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쓰느냐’가 글쓰기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더 확고하게 해준 사람이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올가 토카르추크(Olga Nawoja Tokarczuk)다. (주석3)
처음 그녀의 문장을 읽었을 때, 놀라울 만큼 담백하고 조용하다고 느꼈다. 거창한 표현은 없었고, 단번에 기억에 남는 문장도 드물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 속에는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읽고 생각하고,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려 애썼는지가 스며 있었다. 그건 단지 글을 쓰는 기술이 아니었다. 독자와 세계를 대하는 태도였고, 나는 그것이 진짜 글쓰기라고 느꼈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버티며 쌓아온 생각과 경험을 글로 나누고 싶었다. 설명이 이류라면 어떤가.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어둠 속을 걷고 있다. 밝은 랜턴 대신 꺼질 듯한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말이다. 불안하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길 바란다. 런 사람에게 내 글이 잠시 바람을 막아주는 손바닥이 될 수 있다면, 길을 잃은 순간 옆에 있다는 기척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누가 감히 타인의 인생을 이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생을 두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주석1) A Mathematician’s Apology에서 발췌한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Statesmen despise publicists, painters despise art‑critics, and physiologists, physicists, or mathematicians have usually similar feelings: there is no scorn more profound, or on the whole more justifiable, than that of the men who make for the men who explain. Exposition, criticism, appreciation, is work for second‑rate minds.

(주석2) 하디는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등 영국 수학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20세기 초중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수학자 중 한 명이다. 수학적 업적, 창의성, 라마누잔과 같은 후진 발굴, 철학적 통찰 모두에서 천재적 면모를 보인 인물이다.

(주석3) 폴란드 출신의 심리학자이자 소설가. 
1950년대 이후 동유럽 문학의 흐름 속에서 독특한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를 결합한 작품 세계로 주목받았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신화, 존재와 서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2018년 『방랑자들(Bieguni)』로 노벨문학상(2019년 발표)을 수상했다. 그녀의 글은 화려하거나 난해한 수사보다는 담백하고 투명한 문장 안에 깊은 사유를 담는 것이 특징이다. 독창적인 시선과 오랜 독서·성찰의 결과를 조용한 문체로 풀어내며, 현대 문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대안적 감수성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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